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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결혼식 접수대를 맡은 건에 관하여
접수대는 이미 이전에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나도 마땅히 내가 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내 친구는 나랑 놀기는 원하면서 내 부탁은 들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어 결국 나 혼자 접수를 맡을 처지에 놓였다. 친척들은 죄다 개판이 났고, 친한 친구는 지방에 내려가있으니, 나로써는 부를 사람이 없었다.
뭐 어쩌냐. 그러면 그런대로 나혼자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식장에는 한 시간 일찍 도착해서 미리 전체적인 위치를 머리 속에 입력해두었다. 미리 온 김에 진아 누나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이미 포토 부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냥 멀리서 지켜보는 데에 그쳤다. 괜히 마음이 조급하여 혼자 이리저리 장소 파악해두고 멘트 연습하고 이런 거 하느라 접근하지 못 했던 것도 있다.
나는 10시 쯤에 도착했고, 20분 쯤 큰아빠가 어떤 한 분을 데려와서는 같이 접수대를 맡도록 하였다. 들어보니 큰엄마쪽 친척이라고 하던데, 이미 결혼하신 분이라 조금 경험이 있으신 분이셨다. 인상이 굉장히 착하신 분이셔서 나도 조금은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나로서는 그 분에게 하객 응대를 맡기고 내가 돈을 세는 것을 하고 싶었으나.. 그 분이 그냥 내가 하라고 하셔서 그대로 내가 하객 응대를 맡게 되었다. 내가 많이 어리바리를 깠는데 이 분이 많이 도와주셔서 조금 그나마 괜찮게 업무가 마무리 되지 않았나 싶다. 이름은 모르지만 익명의 힘을 빌려 큰 감사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중간중간 내가 아는 얼굴들도 마주했다. 우리 가족도 왔고, 어머니가 내게 흰 티를 전달해주셨다. 지오다노면 나름 명품 브랜드 아닌가.. 아무튼. 큰 고모와 작은 고모도 보았는데, 나는 솔직히 보면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지만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 가족을 아니더라도 아빠는 아빠다. 조금은 내 생각에 변화가 생기긴 했다. 뭐 어쩌겠나. 나도 받은 만큼은 또 푸는 것이 내 응당한 만족일 것이다. 나는 빚진 채로 그냥 넘어가면 결국 맘에 응어리가 지니까, 그게 내게는 도덕적인 것일 것이며 내게 가장 충실한 일일 것이다. 아무튼 그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선아 누나의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 마음이 심란해져서 추스르느라 조금 고생했다. 선아 누나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 생각을 한두번 한 것이 아니다. 이 마음 혼자 불편하여 결국 나중에 식당에서 술을 깠다.
누나는 있을 자리가 뻘쭘했는데 어느샌가 와서는 내 옆에서 서있는 역할을 맡았다.
아무튼 정신 없이 하객분들을 받다보니 어느새 식이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옆의 분과 함께 정산을 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일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사진을 찍더라고..? 들어보니까 요즘에는 주례도 없이 그냥 신랑 신부끼리 서약을 맺고 한다고 한다. 축가도 남편이 부르셨다고.. 식을 참석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나름 책임을 가져야 하는 일을 했으니 또 어쩔 수 없다 싶었다. 사진 찍을 때 어머니가 잠시 와서 알려주셔서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내적 갈등을 조금 하다가 옆의 분에게 잠시 맡기고 사진에 담기러 갔다. 같이 서주신 분이 정말 배려심 많고 착하셔서 망정이지, 이거 못 찍었으면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 내가 선아 누나에게 가지던 마음은 이제 이 가족에게 옮겨간 것이다. 나를 챙겨주고 배려해주던 사람. 그 은혜를 나는 잊을 수 없다. 특히 내가 돌려줄 수 없게 된 지금 갈 길 잃은 내 마음은 홀로 힘을 키운다. 선아 누나 보내던 마지막 길 큰아빠를 꼭 껴안았던 그 마음이 이 집안에 내리앉은 것이다. 결국 나는 그런 사람이다. 보낼 수가 없다. 나와 관련된 이상, 나의 람이라 여겨지는 순간부터는 그냥 보낼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진아 누나에 대해 축하하고 싶고 위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큰 일이 있었던 이후로 나의 마음이 그렇게 더 커져갔다는 것일 뿐이다.
사진을 찍고 돌아온 후, 축의금 정산까지 끝마친 이후로 어떻게 해야 하나 조금 고민을 하다 밥을 먹으러갔다. 막상 자리에 앉으니 소주가 딱 눈에 띄어버리는... 그러면 또 안 하기 뭣하잖나?! 싶어서 한 병은 나 혼자 깠다. 가족 중에 술 마시는 사람이 나뿐이니 쩔 수 있나. 이 정도로 헤까닥하는 주량이 아니어서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나름, 축의금 담당이라 축의금 봉투는 계속 들고 다녔다. 찾아보기로 괜히 분실되는 케이스가 있다고 하여 그런 일이 절대 발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책임 하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일념. 오랜만에 다시 보는 뷔페. 근데 부모님은 많이 먹지 못하고 일정이 있으셔서 금방 가셨고 누나는 옆에서 계속 딴 소리만 하고 있어 조금 불편한 자리였다. 나 혼자 밥을 먹은 것은 식당이 마치기 전인 13시의 30분 전쯤. 혼자 디저트를 먹으며 그제야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다가, 13시 다 되어서 혹시 더 남은 일이 없는지, 살펴보고 물어보았으나 별 일 없다하여 결국 나는 13시 이후에 인사를 드리고 나오게 됐다.
더 남아있기도 뭣한 게 14시에 바로 공항으로 가서 출국 준비를 해야 한다고..
이렇게 내 첫 결혼식 접수대 역할은 이것으로 끝. 처음 해보는 것이라 너무도 불안했지만, 해야 한다는 일념과 옆에서 도와주신 분덕에 큰 문제 없이 잘 끝을 맺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나 옆에서 도와주신 분이 내 의견을 존중해주시고 천천히 리드해주셔서 크게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었던 듯. 내가 축의금 봉투를 받자마자 바로 드렸어야 했던 것 같기도... 어리숙하여 뭔가 잘 하지 못 해서 조금 죄송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기본적인 역할을 퍽 잘 해낸 것 같아 조금은 만족. 봉투 들어오는 순서대로 번호를 마킹해둔 것은 정말 잘한 것 같다. 앉아있기가 무안해서 손님들 올 때마다 절로 일어서게 되던데 이상하게 보지나 않으셨으면 한다.
이걸로 끝인가. 진아 누나는 이제 4박 6일 태국으로 신혼 여행을 간다고 한다. 부디 둘이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지금은 맺은 인연에 감사하고, 혼의 기쁨을 누릴 시간이다. 이후에는 의정부에 둘이서 같이 산다고 하는데 나중에 한번 집들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회고 및 다짐
자취방으로 돌아오니 대충 15시쯤 되었다. 나름 긴장하고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집에 오니까 괜히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피곤할 땐 술이지.. 마침 어제 혹해서 산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도 있으니 한번 집에서 제대로 하이볼을 만들어보겠다는 요량으로 도전해봤다.
일단 간단하게 향기를 맡고 미지근한 상태의 술을 살짝 입에 담아 맛을 느낀다. 라는 것이 술 시음의 정석 정도인 것 같은데, 입에 머금으려니 혀가 얼얼해서 그냥 넘기는 향만 즐겼다. 맡는 향과 넘기는 향이 술의 향기의 핵심이 아닐까. 맛은 흔한 위스키였다. 달리 보면 가장 잘 알려진 게 스카치 위스키라 그냥 내게 익숙한 것 같기도. 글쎄, 쌩으로 마시는 것 자체는 내게 흔한 경험이 아니기도 하고, 애초에 하이볼 만들 생각으로 가득 찬 지라 한 잔만 그리 마시고 나머지는 내 입맛에 맞게 하이볼 만드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자주 보는 유투버가 추천하는 제조법에서는 위스키와 토닉의 비율을 1:4로 하라했는데 막상 그리 해보니까 맛이 그냥 달달한 음료수 수준이라 술맛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1:2 정도로 하고 레몬즙을 조금 떨어뜨리니 내 입맛에는 딱 맞았다. 상큼하면서 술 넘기는 향도 살짝 남아있는 그런 맛.
이전에는 술을 남기면 술 맛을 버린다고 생각해서 무리해서라도 한번 까면 다 마시려고 했는데, 최근에 영상을 보다가 술을 남겨서 변하는 술의 맛을 즐기는 것도 하나의 매력이라는 것을 알게 돼서 이번에는 다 마시지 않고 남겼다. 산소와 맞닿아서 술이 더 부드러워진다는데 한번 다음에 다시 마시면서 그 변화를 한번 맛보고 싶다.
프로도 씨하고는 원만한 관계로 남으려고 한다. 조금 애매한 관계로 조금 더 나아갔었는데, 역시 나는 마음이 착한 사람한테 끌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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